지하철 6호선을 타고 독바위역에서 내리면 왕복 2차선의 도로가 나오고, 길 건너편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옆으로 2~3층 짜리 연립주택들이 늘어서 있다. 그 사잇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북한산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산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매표소가 있다.
요즘 북한산은 구석구석마다 매표소가 설치돼 있고 요금도 자그마치 1,600원이다. 국립공원을 깨끗하게 관리하려면 입장료도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액수가 조금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일요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곳이 북한산과 도봉산인데 사람마다 그 정도의 입장료를 받게되면 국립공원 관리라는 공익적 측면보다는 이익추구라는 상술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쓰레하다. 입장객 수를 보면 500원이 적정선이고, 아무리 양보해도 1,000원 이상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산길을 올라가니 나도 모르게 '이젠 나에게도 조그마한 아기 산귀신 한 마리가 붙어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 4년 정도 거의 주일마다 산에 올라간다. 그게 무슨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떡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주변을 둘러봐도 월요일이라 그런지 영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어제 부산 형님댁에서 뉴스를 보니 중부지방에 눈이 꽤 온다고 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그저 바닥에 조금 깔린 정도다. 겨울산에서 눈과 찬바람을 빼고 나면 겨울산의 묘미가 없다고 할 만큼 눈은 겨울산을 겨울산답게 하는데 올해 서울의 산에서 눈 구경은 영~ 틀렸나 보다.
등산길 입구에서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북한산 능선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족두리봉이다. 일명 독수리바위라고도 하는데 멀리서 봉우리를 바라보면 족두리를 쓴 여인의 옆모습과 흡사하다. 어느 여염집 규수가 족두리를 쓰고 시집을 가다가 북한산의 중후한 모습에 넋을 잃고 매료되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수천년이 지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있는 것인지........ 영락없이 북한산을 바라보며 다소곳이 고개 숙인 모습이다.
족두리봉은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순탄한 바위봉우리다. 족두리봉에 올라서서 보면 바로 위에 향로봉이 보이고, 그 뒤 조금 오른편에는 다소 가늘고 삐죽이 솟은 비봉이 있다.
천천히 걸어 향로봉 앞에 닿으니 위험하니 올라가지말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향로봉은 전면에서 보면 육중한 몸집을 가진 봉우리로 여러 개의 다소 작은 바위들이 뭉쳐져 있는 것 같은 형태다. 앞에서는 올라갈 수 없지만 향로봉 오른쪽을 끼고 난 길을 따라 가면 이내 향로봉의 뒤편으로 가게되고, 뒷편에서는 쉽게 향로봉의 봉우리에 올라갈 수 있다.
향로봉에서 족두리봉을 보면 역시 족두리를 쓴 여인의 머리와 앞이마 모습이 나타난다. 꽤나 교양있는 지체 높은 양반댁 규수의 모습이다.
살다보면 생각이나 행동을 한 템포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거나 가던 길을 옆으로 빙- 돌아 가야할 때도 많다. 모든 물체에는 관성의 법칙이나 가속도의 법칙이란 것이 작용하듯이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도 이런 법칙들이 적용되는 것 같다.
학교 시험에는 늘 정답이란 것이 있어서 일사불란하게 답안지를 작성하여 단번에 처리하면 우등생이 되지만, 세상살이란 늘 그런 것이 아니어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수도 있고, 또 어제는 이게 옳다고 하던 사람도 내일은 이게 그르다고 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세상살이에는 정답이 없는 경우가 많아 너무 내 생각에만 치우치면 주변을 넓게 보지 못하고 편견이나 아집에 빠져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간단한 이치를 우리는 늘 가볍게 보아 넘기고 뻔한 실패를 계속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향로봉 조금 위에는 비봉이 있다. 비봉은 길 한쪽 옆에 홀로 삐죽이 솟아오른 바위봉우리다. 비봉 꼭대기에는 비석 하나가 하늘 가운데 그림자를 그리며 서 있다. 진흥왕 순수비다. 최초의 순수비(巡狩碑)는 진시황제가 주변 영토를 정벌한 후 그 영토내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비석을 세우고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치세의 도를 밝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진흥왕 순수비도 삼국시대 때 원래 백제의 땅인 이곳을 신라와 백제가 나제동맹을 맺어 고구려로부터 탈환하였는데,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에게 돌려주어야 할 이 땅에 순수비를 세워 자신의 영토임을 표시했다. 이로 인해 나제동맹이 깨어지고 백제는 다시 고구려와 손을 잡는 결과를 초래한다. 원래의 순수비는 너무 손상되어 보존을 위하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기고 지금은 모조품을 만들어 세워 두었다.
발걸음을 비봉쪽으로 옮기니 마음속에서 조그만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비봉 중간쯤에 조금 위험한 곳이 있어서 전에도 몇 차례나 바짝 긴장해서 올라간 경험이 있다. 아무도 없는 이 봉우리를 올라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내 속의 내가 나에게 말한다. '넌 오십이 넘었어. 몸조심해야지 그까짓 비봉 올라가면 뭐해? 건강만 챙겨가면 되지!' '아니야, 여기까지 왔으면 올라가야지! 그래야 온 보람이 있는 거 아니겠어?' 유혹하는 육신과 극복하려는 의지가 조그마한 파문을 일으킨다. '올라가야지!' 하며 가까이 가 보니 바위 위에 잔설이 깔려있기 때문인지 전에 없던 나무울타리를 쳐놓고 위험하니 출입을 삼가라고 적어놓았다. '아-! 그렇잖아도 핑계없어 할수 없이 올라가려는데 잘 됐다!' 하고 옆길로 돌아섰다.
저 앞에 서너그룹의 등산객들이 가고 있다. 조용한 날을 잡아 끼리끼리 등산을 온 모양이다. 양지바른 곳에서 무언가를 나눠먹으며 오손도손 재미있어 보인다.
조금 더 앞쪽에는 사모바위가 있다. 사모바위는 사각형이란 뜻인지? 아니면 사랑한다는 뜻인지? 하필이면 사각형으로 생겨 어느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네모바위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모(思慕)인가 보다. 넓직한 받침석 같은 바위 위에 약간 머리를 숙인 듯한 모양의 네모난 바위가 올려져 있다.
사모바위 조금 못 미친 곳에 작은 헬기장이 하나 있는데, 이 곳에는 앞에 보이는 산봉우리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것이 승가봉이고, 그 뒤에 우뚝 솟은 것이 문수봉이다.
문수봉의 왼쪽으로는 나한봉을 시작으로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는데 의상능선이라 한다. 의상능선 제일 끝에는 의상봉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구기동에서부터 시작되는 긴 능선이 사자능선이고, 능선을 따라 쭈욱- 올라오면 제일 윗쪽에 우뚝 서있는 것이 보현봉이다. 사자능선 아랫쪽은 구기동계곡이다.
문수봉 뒤로 희미하니 대남문이 보이고, 대남문 뒤쪽으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북한산의 주능선인 백운대까지 이르는 북한산성이 있는 능선길이다.
북한산에는 위험지역이 많아 우리 같은 아마추어 등산객들은 올라갈 수 없는 곳이 많다. 승가봉과 문수봉도 그런 곳이다. 봉우리 입구에는 위험하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안분지족이란 말이 잘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건강을 위한 등산이니 분수를 지키야지 함부로 만용을 부리다간 그렇잖아도 중고품인 몸을 완전 폐품으로 전락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승가봉과 문수봉의 왼편으로 난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다니는 안전한 길을 따라 올라가니 청수동암문이다. 청수동암문은 북한산성 곳곳에 있는 다른 출입문과 같이 산성 이쪽과 저쪽의 통행을 위해 만든 문으로 문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의상봉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대남문을 거쳐 북한산의 주능선이다.
청수동암문을 지나 왼편 능선으로 올랐다. 오늘 내가 혼자 북한산을 찾은 이유도 사실은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한 이 의상능선을 한번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도상에 표시된 명칭으로는 청수동암문을 지나 처음 올라가는 봉우리가 상원봉이고, 그 다음 봉우리가 나한봉, 이어서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으로 이어지고, 제일 끝에 의상봉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증에는 상원봉이라고 되어 있는 봉우리는 가사봉이라 표기해야 옳고, 청수동암문은 가사당암문으로, 용출봉과 의상봉 사이에 있는 가사당암문은 청수동암문으로 표기해야 옳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몇 개의 봉우리가 남아있지만 내 마음은 이제 힘들게 올라가야 할 길은 끝나고 천천히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 하산 길로 이어지는 분기점에 도착한 기분이다.
나한봉에서 서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멀리 보이는 비봉 위에는 진흥왕순수비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북한산의 원 이름은 삼각산(三角山)이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마치 뿔이 세 개 돋아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삼각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 나한봉에서 보아도 백운대를 왼쪽에 두고 오른쪽에는 만경대가, 백운대와 만경대 사이에는 인수봉이 뽀죽한 모습으로 그 뿔을 드러내고 있다. 세 개의 뿔이 맞닿아 보이는 그 아랫부분에는 노적봉이 마치 세 뿔의 아랫부분을 받쳐주기라도 하듯이 큼직하게 올라와 있다.
의상능선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비봉능선과는 달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아마 능선이 가파르고 좁아서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인가 보다.
문득 왜 이 능선을 의상능선이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 아래 의상봉이 있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면 북한산계곡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능선의 이름도 원효봉능선이고 원효봉능선의 제일 아래에도 의상봉과 나란히 원효봉이란 이름의 봉우리가 있다. 왜? 왜 하필이면 의상과 원효란 이름이 붙어있을까? 의상과 원효가 여기를 지나갔기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의상과 원효는 대략 서기 660년경 신라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의 사람이라고 한다. 의상은 19세 때부터 당나라로 불법을 배우고자 수차례 유학을 시도하지만 당시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어 그 때마다 고구려군사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약 10년후인 29세 때 원효와 함께 바다를 건너 당으로 가던 중 원효는 동굴에서 잠을 자다 문득 목이 말라 어둠속을 더듬어 작은 샘물을 찾으니 마침 그 옆에 바가지까지 있어 맛있게 물을 마셨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원효는 간밤에 마신 물맛을 생각하며 떠나기 전에 다시 한바가지만 더 마시고 떠날 생각으로 그 샘물을 찾았더니 샘물은 샘물이 아니라 빗물이 고인 조그만 웅덩이에 썩은 낙엽들이 떠다니고, 물을 떠 마셨던 바가지는 해골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갑자기 구토를 했다고 한다.
원효는 이 일로 깨달음을 얻어 불법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하며 당으로 유학가기를 포기하고 돌아와서는 대중 속의 불법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많은 저서를 남기며 왕성한 포교할동을 한다.
그에 비해 의상은 초지일관 당나라로 건너가 당시 당에서 유명했던 지엄대사 아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화엄종의 종파를 이룬다. 원효가 대중과의 희노애락을 통해 불법을 구한 것과는 달리 의상은 철저한 수행과 고난을 통해 불법을 구하였다고 한다.
문득 건너편 원효봉능선과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의상능선을 비교해 본다. 원효봉능선은 둥그스럼하고 다소 큼직해 보이는 원효봉에서 엄청난 힘으로 능선을 따라 봉우리를 밀어 올려 육중한 모양의 백운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 의상능선은 어떠한가? 그다지 높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한 능선길과 급경사를 이룬 양쪽의 산기슭, 그리고 그 아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꼿꼿함이 서려있는 분위기들! 두텁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냘프지도 않는 차가운 고아함이 베여 있는 그런 능선이다.
능선의 끝인 의상봉에 닿으니 세찬 바람이 나뭇가지를 마구 흔들며 요란한 소리를 일으킨다. 그렇다! 의상도 그러했으리라! 이 차갑고 요란한 흔들림 속에서도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홀로 구법의 길을 걸었으리라! 그러기에 이 능선이 의상능선이리라!
혼자 마음을 가다듬으며 길 아래로 내려오니 어느 듯 산아래 조그마한 상점들이 나타난다. '전에 여기에 원목으로 만든 탁자와 의자를 놓고 희미한 갓전등 아래 분위기를 돋운 보리밥 집이 있었는데 ......' 하며 둘러보니 장사가 잘되지 않았는지 다른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5시간여의 산행을 끝내고 북한산계곡 아랫마을인 진관내동에서 구파발행 버스에 올랐다.
북한산 등산지도(아래 주소 클릭)
http://www.koreasanha.net/san/map/bughan_1.jpg
2005/1/31 북한산을 다녀와서...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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