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오죽헌과 안목해변(강릉, 20211012)

OHO 2022. 9. 30. 18:16

오죽헌과 안목해변(강릉, 20211012)


답답할 땐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가까운 곳도 좋지만
이왕이면 먼 곳으로 가고 싶다
무기력한 나로 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기에

때론 멀리, 아주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그냥 멀리 떠나 자유롭고 싶어진다
높은 산을 오르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넓고 푸른 바다가 그립다
오죽헌과 강릉 바다를 찾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5년전인 2016년 봄이었던가?
처음으로 강릉 오죽헌을 갔었다
경내를 한 바퀴 둘러 보았지만
율곡선생과 신사임당이 살았던 곳이란 것 외에는 특별히 마음에 와 닿는 건 없었다
구경을 마치고 떠날려고 하는데
마침 입구 쪽에서 요란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강릉농악단이 들어와 운 좋게도 1시간이 넘도록 농악 공연을 구경하는 행운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하며 은근히 기다렸지만 그때의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오죽헌의 구석구석을 좀더 유심히 보고 율곡선생님과 신사임당에 관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어와 집에서 정리를 해보았다.
어머니인 신사임당도 훌륭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율곡선생도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되니
이런 분들을 오늘 날 우리가 표상(表象)으로 삼고 본받지 않는다면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우와좌왕 헤메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마음 속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심이다

한 달전쯤 해파랑길을 걸으며 경포호 둘레길과 경포대해수욕장, 강문해변, 송정해변, 그리고 이곳 안목해변까지 전부 지나간 바 있다
그러나 해파랑길 걷기는 머무는 시간이 거의 없고 오로지 걸으며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는 것이다
그러니 풍경 속에 머물며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하긴 어렵다
이번엔 많이 걷기 보다는 천천히 머물며 강릉항과 안목해변에서의 여유를 즐기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어느 정도 구경을 끝내고 해변가 작은 식당으로 들어가 꼬막비빔밥 한 그릇 먹으며 비록 충분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강릉에서의 소소한 하루를 보냈다.

갔다온 날 - 2021 10. 12
오호(五湖)



오죽헌 입구

오죽헌 인증

5만원 짜리와 5천원 짜리 지폐에 새겨진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 탄생지
신사임당과 율곡 모자(母子)가 각각 5만원 짜리, 5천원 짜리 화폐에 새겨진 것은 세계 최초라고 한다

오죽헌 경내

율곡이이 상(像)

見得思義(견득사의)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德水 李珥 書 덕수 이이 서)

栗谷 李珥(율곡 이이) -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호는 율곡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이고, 어머니는 우리의 구원(久遠)의 여성상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사임당(師任堂) 신(申) 씨이다. 율곡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에 어머니가 용꿈을 꾼 후에 이곳 오죽헌(烏竹軒) 몽룡실(夢龍室)에서 태어나 1584년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향년 49세로 별세하였다. 천자(天資)가 영오(潁悟)하여 어린 나이인 8세에 지은 화석정(花石亭) 시와 10세에 지은 경포대부(鏡浦臺賦)는 길이 세상 사람의 찬탄을 받은 글이고,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으로 올라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29세 8월에 명경과(明經科)에 장원 급제하여 양관(兩館) 대제학과 여러 조(曹)의 판서를 두루 거쳤고, 사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율곡은 벼슬 길에 있으면서 문(文), 사(史), 철(哲)의 수많은 저술을 남겨 한국 유학의 거벽(巨擘)으로 칭송 받고 있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독창적 견해로 이기설(理氣說)을 진일보 시켰고 , 나라와 민생을 걱정한 현실의식에 투철하여 개혁의지를 구현하려고 힘썼으며 그 유명한 10만 양병론도 이러한 의지의 표상이다.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申師任堂 草蟲圖 花壇) -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현숙한 여성 중 한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임당은 시, 글씨, 그림, 자수에 뛰어난 예술가였다. 그림으로는 산수와 포도를 잘 그렸으며, 풀과 벌레 역시 잘 그렸다. 특히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식물과 벌레를 그린 초충도에서는 자연을 허투루 보지 않았던 사임당의 심성과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해 내는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을 직접 본 숙종대왕은 "오직 풀이요 벌레거늘 모습이 아주 비슷하구나, 부인이 묘사한 것이 어찌 이처럼 오묘할고" 라는 시를 지었고, 권상하는 "실물과 똑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며 감탄할 정도였다. 오죽헌에서는 초충도의 주요 소재인 오이, 수박, 가지, 맨드라미, 양귀비, 봉선화, 원추리 등을 심어 화단을 조성하였다. 식물들 주위로 벌, 나비, 잠자리, 여치, 방아깨비, 쇠똥구리와 같은 날벌레와 길벌레가 모여 마치 한 폭의 초충도를 보는 듯하여, 화단의 풍경과 그림을 직접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심사임당 초충도 화단의 일부

사임당 빛의 일기
한 때 TV 드라마로 방영 되었는지 주인공 이영애와 송승헌의 메모와 손바닥 인증이 되어 있다

주변에 있는 나무기둥에는 당시 드라마에 참여했던 배우들의 메모와 손바닥 인증이 있다

오죽헌 안내도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 - 오죽헌은 원래 조선 초기 강릉의 선비 최치운(崔致雲)이 지은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들 최응현에서 외손에게로 상속되어 오다가 1975년 정화 사업 때 강릉시로 이관되었다. 경내에 율곡 이이의 사당인 문성사와 율곡기념과, 강릉시립박물관과 율곡인성교육관 등을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가옥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5만원 권과 5천원 권 도안 인물인 신사임당과 이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예술가이다. 자수, 시문,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그림을 잘 그려 생존 당시에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초충도, 전서 등의 글씨, 사친(思親),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 등의 한시가 전한다. /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에게서 학문을 배워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9세에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호조좌랑에서 시작하여 황해도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을 지내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다. 천도책(天道策), 성학집요(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학교모범(學校模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오죽헌에서 태어나 자랐던 이이는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를 뵙기 위해 자주 강릉을 다녀갔다.

자경문(自警門)

율곡이이선생 유적정화기념비

오죽헌으로 들어가는 문

문성사(文成祠)
문성은 율곡의 시호로 율곡의 사당이란 뜻이다

오죽헌 - 오른쪽에는 몽룡실

오죽헌 인증

몽룡실(夢龍室) - 율곡 이이 선생께서 탄생하신 방입니다. 태어나시던 날(1536년 12월 26일) 신사임당께서 용꿈을 꾸고 율곡 선생을 낳으신 연유로 몽룡실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오죽헌 - 이 방은 율곡선생이 어린 시절 성현의 길을 기약하며 학문을 하시던 마루방이다. 조선 초기 별당 양식의대표적인 건물로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고, 안에 있는 글은 율곡선생의 격몽요결의 구절로 아래와 같다/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를 힘써야 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왼쪽 글) /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학문을 하기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소견이 어두워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 학문에 임하는 사람은 누구나 뜻을 세워 자기도 성인(聖人)이 되리라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꾸준히 정진할 것이니라 (오른쪽 글)

왼쪽 방에는 뒷쪽에는 여러 선비들의 글들이 걸려있고 그 얖에는 역시 흰색 종이에 격몽요결의 글귀가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非禮勿動),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四者修身之要也)


오죽헌 - 조선 초기에 지으진 별당 건물로 당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주택이다. 이 건물은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에서 익공양식(翼工樣式)으로 변해가는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 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왼쪽 마루방은 율곡이 여섯 살 때까지 공부하던 곳이며, 오른쪽 온돌방은 1536년 신사임당이 용이 문머리에 서려 있는 꿈을 꾸고 율곡을 낳은 곳이다. 몽룡실(夢龍室)이라고 부르는 이 온돌방에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강릉 오죽헌 율곡매 - 이 나무는 세종 22년(1440년)경에 이조참판을 지낸 최치운이 오죽헌을 건립하고 별당 후원에 심었다고 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선생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한다. 사임당은 여러 매화 그림을 그렸고 맏딸의 이름을 매창(梅窓)이라고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다. 율곡매는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 종류이며, 열매는 다른 나무에 비해 훨씬 알이 굵은 것이 특징이다.

사임당 배롱나무

사임당 배롱나무 - 강릉시의 시화(市花)로 꽃 피는 기간이 100일이나 된다고 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이 배롱나무는 고사한 원줄기에서 돋아난 새싹이 자란 것으로 나이가 600살이 넘는다. 신사임당과 율곡 모자가 어루만졌을 이 배롱나무는 율곡송(栗谷松)과 함께 오늘날 오죽헌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성사의 율곡선생 초상

오죽헌 주변의 오죽(烏竹)

신사임당의 글 <어머니를 그리며> - 산 첩첩 내교향 여기서 천 리/ 꿈 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 뿐/ 한송정 언덕 위에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는 바다 위를 오고 가겠지/ 언제쯤 강릉 길 다시 밟아가/ 어머니 곁에 앉아 바느질 할꼬

방안에는 율곡선생을 기리는 문사들의 글이 걸려있다

격몽요결 거가장의 한 구절 - 집에 있을 때에는 예법을 지켜 집안 식구들을 거느려야 하며, 각자에게 직분에 맞도록 알맞은 일을 나누어 주어 알뜰히 해 나가도록 보살펴야 합니다. 씀씀이를 먼저 정하여 두었다가 살림의 정도를 보아가며 지출하고, 위 아래 사람들의 의식과 결흉의 비용은 정해진 바에 따라 고르게 해야 합니다. 특히 낭비를 줄이고 사치를 막아 조금씩 저축으로 여유를 만들어 좋아야 뜻밖의 일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형제는 부모에게 똑같이 몸을 물려받았으니 나와는 한 몸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고 나는 나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되며, 음식과 의복은 있고 없는 대로 모두 함께 해야 합니다.

방안에 걸려있는 율곡을 기리는 문사들의 글

운한문((雲漢門) - 운한문은 막돌담장으로 둘러싸인 어제각을 드나드는 출입문이다. 어제각과 함께 정조 12년(1788년) 지금의 문성사 앞에 건립되었다가 1987년 이 자리로 옮겨와 복원되었다. 정조대왕이 율곡의 격몽요결과 벼루를 궁으로 가지고 오게 하여 직접 본 후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내자 당시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 강릉부사 맹지대가 어명을 받들어 어제각을 지었다. 운한(雲漢)은 은하수를 뜻하며 시경(詩經)의 대아편(大雅篇)에 나오는 탁피운한 위장우천(倬彼雲漢 爲章于天) 밝은 저 은하수 하늘에 둘렀구나)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정조대왕의 덕을 칭송하는 의미로 쓰였다. 운한문의 글씨는 어제각을 건립할 당시 썼을 것으로 보이나 작자는 알 수 없다. 문(門) 자는 중국 송대 왕희지의 초서체를 본받아 쓴 글씨다

운한문

어제각(御製閣) -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 시절 사용하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었다. 1788년 정조 임금은 벼루와 격몽요결이 오죽헌 에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들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보았다. 그리고 벼루 뒷면에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지어 새기게 하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붙여 잘 보관하라며 돌려 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관찰사 김재찬이 이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집이 어제각이다

어제각

어제각에 보관된 물건들 - 율곡의 모습이 담긴 5천원 꿘 앞뒷면, 율곡이 쓰던 벼루, 격몽요결, 정조 임금이 격몽요결과 벼루를 직접 보고 격몽요결 서문과 벼루 뒷면에 글씨를 써서 돌려 보냈다는 벼루 뒷면 글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의 내용은 아래와 같음/ 어제 어필 -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涵婺池 함무지)/ 공자의 도를 본받아(象孔石 상공석)/ 널리 베품이여(普厥施 보궐시)/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지만(龍歸洞)/ 구름은 먹에 뿌려(雲潑墨 운발묵)/ 학문은 여기 남았구려(文在玆 문재자) * 참고로 오천원 권 지폐에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되어 있다고 한다

구옥 주련(舊屋 柱聯) - 이 주련 10폭의 글씨는 조선 정조 때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필적을 판각한 것으로 명나라 진계유(陳繼儒)의 암서유사(巖棲幽事)에 나오는 시구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得閒多事外(득한다사외) 한가로움은 많은 일 밖에서 얻고/ 知足少年中(지족소년중) 흡족함은 젊은 시절에도 알더라/ 種花春掃雪(종화춘소설) 꽃씨는 봄눈을 쓸고 심으며/ 看籙夜焚香(간록야분향) 밤에 책을 읽으니 향기가 풍겨온다/ 有客來相訪(유객래상방) 나를 찾아온 손님이 있더/ 通名是伏羲(통명시복희) 만나 보니 역시 훌륭한 선비님/ 酒國有長春(주국유장춘) 술 있는 곳에 늘 봄이 깃들어 있고/ 硏田無惡歲(연전무악세) 선비의 마음 속에는 풍흉을 모른다/ 感慨甘棲遯(감개감서둔) 고요함을 찾아 삶을 깊이 느껴보니/ 環往破寂蓼(환왕파적료) 그것을 깨는 것은 오고 감이라네

구옥 주련 10폭 중 앞면 6련

옆면 4련

율곡선생 행장기(栗谷先生 行狀記)

율곡선생 행장기(栗谷先生 行狀記) 내용 - 율곡 이이 선생은 1536년 음력 12월 26일 이 곳 오죽헌 몽룡실(夢龍室)에서 이원수(李元秀)공과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세 살에 말과 글을 익혀 열 살에 <경포대부 鏡浦臺賦>를 지었으며,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간 시묘한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스무 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 自警文>을 지어 입신행도(立身行道) 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스무 두 살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열세 살 진사초시에 장원한 것을 시작으로 스물 한 살 한성시(漢城試)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스물세 살 겨울 별시에서 <천도책 天道策>을 지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떨쳤다. 스물 아홉에 문과 전시(殿試)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리기도 했다.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이조좌랑, 홍문관교리, 우부승지, 사헌부대사헌, 예문관제학, 사조(호조, 형조, 병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서른 세 살에는 천추사(천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교육자, 철학자이자 경세가인 선생은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만언봉사 萬言封事>를 지어 정치, 경제, 사회 개혁을, <동호문답 東湖問答>과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지어 군왕의 도를 개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군사 십만 명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향약(鄕約)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고, 사창제도(社倉制度)를 시행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고산구곡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우고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는데 이 때 <격몽요결 擊蒙要訣>과 <학교모범 學校模範>을 저술하였다. 1584년 마흔 아홉에 세상을 떠났으며, 40년 뒤인 1624년 인조대왕이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율곡기념관 - 안에는 율곡과 관련된 문서 등 여러 가지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입지문(立志門)

강릉 석불 입상

강릉 석불 입상 - 고려시대 석불입석이다. 옥천동 민가에 있던 것을 1992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머리 윗부분은 손상이 심하여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다. 사각형의 납작한 얼굴에 두 눈은 수평으로 길며, 코는 마모가 심하여 형체르 ㄹ알아보기 어렵다. 두 발은 불상의 몸과 함께 조각하지 않고 받침대인 대좌에 조각하였다. 굴곡 없는 통 모양의 신체 표현, 사각형에 가까운 토속적인 얼굴, 불상의 발을 신체와 함께 조각하지 않고 따로 대좌 위에 조각하여 하반신의 발목과 연결되게 한 점 등은 고려시대 돌조각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불상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가 없어지고 전체적으로 마모도 심하지만 고려시대 조각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모형

굴산사지 당간지주 모형 안내문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독대

장독대

강릉 병산동 주거지 유적

강릉 병산동 주거지 - 1998년 강릉시 병산동 공항대교 접속도로 공사구간 내에서 발굴 조사된 주거지 45기는 철기시대(BC. 1 ~ AD. 2)의 주거 유적으로 대부분 반 움집이나 일부 지상가옥 형태로 확인되었다. 그중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조사된 4호 주거지를 이곳에 이전 복원하였다. 4호 주거지는 61.8 평방미터 크기로 철자(凸字)형 평면 형태를 갖춘 반 움집이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U자형 철제 삽날은 당시의 농경 기술과 철기문화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유적은 철기시대의 가옥 발달사와 문화전파 및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병산동 주거터

강릉 병산동 고분 - 강릉시 공항대교 접속도로 건설구간 내 문화유적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45기의 신라시대 무덤 중 9호, 26호 무덤과 2호, 3호, 독(옹기)무덤을 이전 복원한 것이다. 이 고분에서는 토광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석곽옹관묘 등의 다양한 무덤 형식과 금귀걸이, 토기류, 철제류, 마구류, 등의 부장품이 매장 당시의 원형을 유지한 채 발굴되었다. 9호 무덤은 길이 310cm, 폭 60cm, 깊이 75cm의 수혈식 석곽묘로 토기류와 철기 등이 출토되었다. 영동지역 신라고분의 매장의식과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강릉 병산동 고분 유적

충노 문리동 행적비 - 문리동은 조선시대의 관노(官奴)이나 임진왜란 때 전란의 피해 강릉부사 이광준을 모시고 산골로 들어갔다가 양식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산에 흩어진 나락을 모아 연명하게 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사를 섬겼다. 그의 행실을 기특하게 여겨 이 비를 세웠다

충노(忠奴) 문리동 행적비

강릉비석군 -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 강릉부사, 찰방으로 있던 관리들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여러 기념비 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강릉비석군 - 모두 합해 20기

모과

신사임당상

신사임당

사임당 신씨 - 기묘사화 때 난을 면한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의 다섯 딸 가운데 사임당은 둘째 딸로 1504년 음력 10월 29일에 이곳 오죽헌에서 태어나 1551년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고, 우리나라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르는 율곡은 셋째 아들이다. 사임당은 우리 역사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여성으로 부덕(婦德)은 만인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천부(天賦)의 자질이 남달리 비범하여 여공(女功)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 그림, 학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발휘된 작품과 업적이 오늘까지 남아 전하여 뒷 세상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거벽(巨擘)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매창과 옥산과 같은 자녀를 두었으니 이들은 다 어머니의 자질과 훈도에 연유하여 서예나 그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있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 민족의 만세(萬世)의 여성상이라 이를 것이다

강릉시립박물관

쉽터

율곡인성교육관

2020년 동계올림픽 때 성화를 놓아 두었던 곳으로 추정

오죽

어머니의 길 -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긴 '어머니의 길' 입니다. 강릉시는 오죽헌에서 낸다리 마을 사모정공원에 이르는 길 (1.5km)을 사임당 512주년 탄신일인 2016년 11월 28일(음력 10월 29일)에 '어머니의 길'로 명명하여 세계에서 유일한 '어머니의 길'이 탄생 되었습니다. 그 옛날 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한양으로 떠나던 길입니다. 이 고장에서 탄생한 사임당과 율곡 모자의 우리나라 화폐인물로 등장할 만큼 이 분들의 예술과 학문, 효 사상은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 민족 전통문화정신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어머니의 길'을 걸으며 강릉이 효의 고장으로 꽃피어 효문화가 더욱함양되고 세계인의 가슴 속에서도 새겨져 온 인류가 한 가족이 되기를 기우너합니다. 밤 하늘의 별 빛 같은 부모님의 사랑은 영원히 빛 날 것입니다.


<아래부터는 강릉 안목해변>

안목해변

강릉항

강릉 커피거리

안목해변

강릉항 요트정박장

강릉항 등대

강릉항에서 본 남항진 해변

강릉항 등대 인증

강릉항 등대

안목해변

안목 거피거리의 거피숍 건물들

안목 거피거리의 거피숍 건물들

안목해변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