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軸山歌 - 계룡산에서(2007. 4. 15)
하얀 벚꽃 따라 찾아왔던 4월도 이젠 떠나려나 봅니다.
지난밤에 촉촉이 내린 이슬비에 떨어지는 꽃잎을 보고
4월도 이젠 떠날 채비를 하나 봅니다.
텅 빈 나뭇가지 사이로 눈이 부시도록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바람 따라 살랑살랑 춤을 추며 찾아왔던 4월도
떨어지는 꽃잎 따라 이젠 조용히 떠나려나 봅니다.
짧은 행복.
화려했던 꿈.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나, 둘, 떨어지는 꽃잎처럼
4월은 그렇게 떠나려나 봅니다.
사당역을 떠난 버스는 2시간만에 공주시 계룡면의 동학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이젠 4월도 중순이 되었건만 아직도 전국은 벚꽃놀이 열풍으로 떠들썩합니다.
긴 겨울을 보내고,
하얀 벚꽃이 하늘을 뒤덮은 환상속의 꽃길을 걷는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이맘때면 이 곳 계룡산 동학사 입구도
하얀 벚꽃이 출렁거리는 더없이 아름다운 산책길로 변합니다.
벚꽃놀이하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바람에 날리는 하얀 꽃잎 사이를 걷는 상상만으로도
정다운 연인과 함께 꿈길을 걷는 듯한 행복에 빠져듭니다.
버스에서 내려 동학사 입구에 들어서니
넓고 조용할 것으로 기대했던 산책길은 수많은 인파로 어지럽고
바람에 살랑대며 우릴 반길 것으로 생각했던 하얀 벚꽃도
지난밤에 촉촉이 내린 빗방울에 젖어 거의 다 떨어져버렸습니다.
간간이 가지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때늦은 꽃잎들을 보며
이젠 벚꽃으로 화려했던 4월도
날리는 꽃잎처럼 어디론가 훨훨 떠날 것을 생각합니다.
동학사일주문을 통과하니 멀리 계룡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길옆에는 두어 그루의 하얀 벚꽃나무가 바라보이는 조그만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 산행을 기념하고자 잠시 포즈를 잡았습니다.
아직 초파일은 멀었건만 머리 위로 줄지어 매달린 색색들이 연등들은
오늘 산행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부풀려줍니다.
계룡산은 주봉인 천황봉(845m)에서부터 관음봉(756 m), 삼불봉(755.5m)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마치 닭벼슬 모양의 뿔을 가진 용을 닮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계룡산(鷄龍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주봉인 천황봉이 845m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이지만
기암절벽의 바위산과 깊은 계곡, 아름다운 폭포가 어우러진 뛰어난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과 백제문화의 유적, 이태조의 건국설화와 여러 사찰 등등,
역사와 문화의 뿌리까지 고루 갖춘 유서 깊은 명산이기도 합니다.
동학사까지 이어지는 탄탄대로를 지나고
돌무더기길을 따라 관음봉으로 향합니다.
‘이런 돌무더기 속에서 무슨 오묘한 신통력이 나와 무속신앙 운운(云云)하게 되었을까?’
의문과 실망감이 자꾸만 고개를 듭니다.
산중이라 그런지 새싹이 돋아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른 가 봅니다.
휑하게 빈가지엔 여전히 겨울의 상흔이 남아 있습니다.
“휴! 힘들다!”
돌무더기 사이를 걷기도 힘든데
길은 갈수록 가파르고 곳곳엔 돌계단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중간쯤 올랐을까?
저 앞 벼랑 끝에 목책 난간으로 둘러쳐진 휴식처 같은 것이 보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니 은선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입니다.
은선폭포(隱仙瀑布)는 동학사계곡 위에 있는 20여미터 높이의 폭포로
폭포 주변의 기암절벽과 그 위로 보이는 쌀개봉의 능선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신선이 숨어사는 곳이란 뜻으로 숨을 은(隱)자, 신선 선(仙)자, 은선폭포라 하였다고 합니다.
물이 말라 폭포수의 장관은 볼 수 없었지만
물길을 이루는 거대한 암벽만으로도 그 위용을 본 것이나 다름없는 듯합니다.
폭포의 장관을 바라보며 잠시 땀을 식힌 후 또 다시 돌무더기길을 오릅니다.
정말 지루하고 따분한 길입니다.
계룡이란 이름이 풍기는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와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밋밋하고 따분한 돌무더기길에 적지 않은 실망감을 느낍니다.
계룡이란 이름은 마치 신선이라도 나올 듯한 심산유곡의 은은한 분위기와
그에 어울리는 울창하고 짙은 숲길을 연상케 하건만
민대머리처럼 훤히 뚫린 하늘에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돌무더기라니.........
한 30년쯤 되었나 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 친구들과 함께 계룡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 때도 그 유명한 계룡산엘 간다고 마음이 들떴었는데
막상 도착해서 본 계룡산은 별것 아니었다고 생각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오르는 계룡산도 그 때의 계룡산과 같이
제 이름값을 못하는 한낱 야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무더기의 산비탈을 올라 마침내 계룡산의 주능선인 관음봉 안부에 닿았습니다.
이젠 힘든 길도 끝났고 체력도 어지간히 소진되었으니 잠시 쉬어갈만도 한데
시종일관 묵묵히 먼저 올라가시는 선배 한 분을 보고
무슨 운명 같이 다가오는 우리네 인생살이를 생각해 봅니다.
좋든 싫든 우리 앞엔 그렇게 쉬지 않고 걸어가야 할 그 어떤 길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이 다하는 날 우리의 인생도 다하게 될 것 같은 그런 운명 말입니다.
그 운명의 의미를 되새기며 관음봉에 닿습니다.
관음봉은 좁고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라
여느 산의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장쾌한 느낌은 없었으나
저만치서 뽀죽한 안테나를 머리에 쓴 천황봉의 모습이 늠름하고
건너편에 있는 문필봉과 연천봉의 자태도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비좁은 틈바구니라 제대로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내려오니
봉우리 아래에는 벌써 자리를 펴고 점심 준비가 한창입니다.
그다지 넓은 자리가 없어 되는대로 둘러앉아 얼른 뚝딱 한 그릇 해치웁니다.
함포고복(含哺鼓腹)이라 !
불룩한 배 두드리며 엉거주춤 일어나서
“어허~! 삼불봉이 어디메뇨?”
잠시 방향감각을 잃어 게슴츠레한 실눈으로 우왕좌왕 헤매다가
철제난간 한쪽 끝에 두어 사람 올라오는 것을 보고
“아하~! 저기로구나!”
난간 끝에 서서 바라보니 내리막길은 깎아지른 절벽이로다.
아슬아슬, 사리살짝, 조심스레 내려가나
계룡산의 절경만은 놓칠 수가 없어 간간이 고개 들어 눈앞에 펼쳐진 멋진 광경을 바라보니
“어허~! 그야말로 절경이로다!”
그윽한 심산유곡 물안개 피어나고
드높은 벼랑 위론 우뚝 솟은 산봉우리
계룡산 천하지절경 일러 무엇 하리오
관음봉 높은 곳에 꿈틀대는 산능선은
끊일 듯 이어질 듯 애간장을 녹이는데
무심한 실바람만 유유자적 하노라
은은한 솔향기에 속세 떠난 삼불봉아
크고 작은 봉우리는 신선들의 휴식처인가
흐르는 세월 속에 무릉도원 꿈만 꾸네
관음봉과 삼불봉을 이어주는 능선을 자연성능(自然城陵)이라고 합니다
능선을 중심으로 오른쪽 동학사 방향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요,
왼쪽 갑사 방향으로는 급경사의 비탈을 이루고 있는 자연성능은
크고 작은 바위봉우리로 연결되면서 이어진 듯 끊어진 듯 꼬불꼬불 휘어지는데
그 길의 모습이 마치 자연적으로 형성된 성곽과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능선을 걸으며 바라보는 삼불봉과 관음봉의 모습도 일품이지만
절벽 아래에서 불어오는 은은한 향취는
그야말로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하는 신선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고나 할까요?
한 마디로 자연성능은 계룡산의 백미요,
계룡산을 계룡산답게 만들어주는 계룡산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능선이라 할 것입니다.
모두가 능선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힘든 줄도 모르고 희희낙낙 걸어갑니다.
멀리 보이는 삼불봉의 은은한 기품 또한 아름답다 못해 차라리 고고하다고나 할까요?
다른 산에서는 쉬이 접할 수 없는 오묘하고 은근한 분위기는
그 동안의 실망감을 깨끗이 씻어내고
계룡산이란 이름에 걸맞는 멋진 경관과 신비감까지 충족시켜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한 장면, 한 장면,
그리고 한 순간, 한 순간까지도 놓치지 않으려고
보고 또 보며, 감탄에 또 감탄을 연발합니다.
아~! 아~! 계룡산아!
진실로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다! * 명불허전 - 이름이 헛되지 전하지 않음
삼불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하나, 둘, 남매탑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올라갈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내려가는 길 또한 돌무더기길 입니다.
어쩌면 이 돌무더기들도 한낱 무덤덤한 돌무더기가 아니라
계룡산의 수호신으로 수만 년 동안 이곳을 지켜온 계룡의 용비늘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명산에 이처럼 돌무더기가 너부러져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동학사를 지나 돌무더기길로 처음 들어섰을 때 느꼈던 실망감도
고교를 막 졸업한 내 한창 시절에 계룡산을 오르면서 가졌던 무덤덤함도
모두가 내 무지의 소치라 생각되어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집니다.
남매탑을 거쳐 동학사 입구로 내려오니
길가의 계곡물이 졸졸거리며 봄을 노래합니다.
이른 봄의 계곡물이라 그런지 전에 없이 맑고 차가워 보입니다.
잠시 발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니
차가운 물 기운이 뼈 속까지 스며들며 느슨해진 심신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줍니다.
어느덧 동학사 입구의 산책길에는 하나, 둘, 우리 지축가족들이 모여 들고
길가에 줄지어 선 벚꽃나무들은 하얀 꽃잎을 날리고 있습니다
이젠 저 벚꽃처럼 4월도 그렇게 하루하루 떨어져 내리겠지요!
<동학사 일주문>
<동학사 입구에서>
<동학사로 가는 길>
<은선산장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길>
<은선폭포 전망대에서>
<은선폭포>
<은선폭포 전망대에서>
<은선폭포 전망대에서>
<은선폭포 전망대에서>
<관음봉을 오르며 - 9회 백명부 선배님>
<관음봉 돌계단길>
<관음봉에서>
<관음봉에서>
<관음봉 아래서 점심식사중>
<관음봉에서 - 9회 백명부 선배님 부부>
<관음봉에서>
<관음봉에서?>
<자연성능길>
<자연성능에서 관음봉을 배경으로>
<삼불봉을 배경으로>
<삼불봉을 배경으로 - 10회 박웅사 선배님과 양정권 부인, 우오현 부인>
<삼불봉 앞에 자리한 작은 봉우리에서>
<삼불봉에서>
<삼불봉에서>
<남매탑에서>
본래는 청량사지5층석탑과 청량사지7층석탑이라 하는데, 한 수도승이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호랑이를 구해준 보답으로 호랑이가 처녀를 물어다 주었는데 그후 처녀의 부모로 부터 혼인을 해달라는 간청을 받았으나 수도승은 출가한 몸으로 혼인을 할 수 없어, 비구와 비구니로 남매의 인연을 맺고 수도를 하다 같이 열반에 들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해 여기에 탑을 세우고 그 이름을 남매탑이라 하였다고 함
<계룡산 등산지도>
<산행코스>
동학사 주차장 - 동학사 - 은선산장(은선폭포) - 관음봉(중식) - 자연성능 - 삼불봉 - 남매탑(오뉘탑)
- 동학사 - 동학사 주차장
<참석하신 분들>
9회 - 김무남님, 백명부님 내외분, 허정님, 안진수님
10회 - 박웅사님
13회 - 김정묵님
15회 - 박창욱님
16회 - 정부남님
17회 - 한석수님, 김경수님
18회 - 강진희님, 이영우님
21회 - 김동관님 내외분, 박두호님, 노민규님 내외분, 김상문님, 하민우님
22회 - 예창기님 내외분, 이윤석님 내외분, 우오현님 내외분
23회 - 오광님 내외분,
27회 - 왕종수님, 이원균님
30회 - 양정권님 내외분
35회 - 서종호님
기타 - 이운영님(박웅사님과 동행)
총 34명
2007. 4. 15 계룡산을 다녀와서
오호 우오현
<계룡산에 관한 역사와 문화>
계룡산은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대표하는 산으로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던 산이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오악(五岳: 동의 토함산, 남의 지리산, 북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 중의 서악으로,
조선 시대에는 삼악(三岳: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으로도,
오악(五岳: 동악 금강산, 서악 구월산, 남악 지리산, 북악: 北岳) 중 중악(中岳)으로도 불려진 명산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상으로도 정감록에서 말하는 큰 변란도 피할 수 있는 소위 십승지(十勝地)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던 곳이었다.
높이가 가장 높다는 천황봉이 845.1m밖에 안 되는 산이지만,
백제문화의 유적과 사찰, 이 태조의 개국의 꿈이 서린 곳이다.
역사관광 또는 자연관광지로서도 그러하지만
기암절벽과 바위산, 깊은 계곡과 폭포, 아름다운 숲이 있어
국립공원 산 중에서 월악산 다음으로 작으면서도,
계룡산은 지리산에 이어 설악산 한라산을 제치고 두 번째로 국립공원에 지정된 명산이다.
산 이름을 왜 계룡산(鷄龍山)이라 하였을까?
주봉인 천황봉(天皇峰:845m)에서 연천봉(連天峰:739 m)·삼불봉(三佛峰:755.5m) 등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의 볏을 닮은 뿔을 가진 용과 같고
그 밑 부분은 용 비늘처럼 보이는 산이라 하여 닭 鷄(계), 용 龍(용), 鷄龍山(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 초기 신도안(新都內)에 도읍을 정하려고
이 태조와 동행한 무학대사가 이 산의 형국에 대하여 말했다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鷄'(계)에다가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에서 '龍'(용)을 따서 '鷄龍山'(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때 '西岳 계룡산’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계룡산이란 이름은 1천년 전부터 쓰인 유서 깊은 이름이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계룡산에 대표적인 사찰로는
동쪽에 동학사(東鶴寺), 북서쪽에 갑사(甲寺), 남서쪽에 신원사(新元寺)가 있다.
그 중 신원사는 백제 의자왕11년 (651년)에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본디는 신정사(神定寺), 신원사(神元寺)라 하다가 조선조 고종 때 신원사(新元寺)라 고쳤다 하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한다.
이조 건국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 성계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 공사를 하고 있는데
"팥거리 할머니"가 있어 "이 성계의 꿈을 장차 임금이 될 꿈이라고 풀어주면서,
이곳은 뒷날 정씨(鄭氏)가 도읍할 곳이니라 너의 땅이 아니니 너는 한양으로 가거라." 하였다.
이에 공사를 중단하고, 이 성계는 그 노파를 천기가 누설될지 모른다 하여 죽여 버리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그 넋을 달래기 위해 절을 증축하고
풀 '伸(신)' 원통할 寃(원) 伸寃(신원)의 음을 따서 신원사(神元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이 절을 중건하였다거나,
무학대사의 현몽으로 태조가 신원사 경내에 있는 중악단(中岳壇)에서 산신제를 올렸다는 기록은
이 전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팥거리 할머니는 산신이 되어서 대바위라 불리는 상봉에서 계룡산을 다스리고 이씨다고 한다.
연천봉 가는 길에 대나무 숲이 유난히 무성한 곳에 고왕사(古王寺)라는 신원사의 부속 암자가 있다.
660년에 창건되었다는 이 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백제가 망할 때 의자왕이 이곳에 숨었다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붙잡혀 당나라에 갔다 해서
옛 '古(고)', 임금 王(왕), 고왕암(古王庵)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동학사는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가 암자로 지은 곳에 회의 스님이 창건하여 상원사(上願寺)라 이름하였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유차달이란 사람이 이 절에 와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招魂祭)를 지낼 때,
동계사(東鷄祠)를 짓고 절이름을 동학사(東鶴寺)라 하였다.
이 절의 東(동)쪽에 鶴(학) 모양의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삼불봉(三佛峰)이란 명칭은 동학사나 천황봉에서 멀리 바라다보면 봉우리가 셋이 보이는데
그 모습이 세 부처님 모습 같다 하여 삼불봉(三佛峰)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계룡팔경 중 제2경으로
'삼불봉의 설화(雪花)'는 겨울 계룡산의 자랑이 되는 최고의 경관이어서 붙인 말이다.
지리산8경 중에 6경에 '관음봉 한운(閒雲)'이 있다.
이것은 관음봉 정상에 있는 관음정(觀音亭)에 누워서 하늘에 떠다니는 하얀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가로운 신선이 누워 구경하는 마음이 든다하여 생긴 말이다.
이 일대는 계룡산을 대표한다는 절승 동학사 계곡과 신원사 계곡을 앞뒤에 두고
쌀개봉, 문필봉, 연천봉의 아름다움 속에 묻혀 있는 일대의 절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은선폭포라는 이름은 쌀개봉과 관음봉에서 흘러내리는 상류 동학사계곡 물이
20m 이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나,
폭포 앞의 기암절벽이라든지,
우러러 보이는 쌀개봉의 선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옛날 신선이 숨어살았던 곳이라 하여 숨을 '隱'(은), 신선 '仙'(선) 은선폭포(隱仙瀑布)라 한 것이다.
계룡산 겨울산행에서의 백미(白眉)로는 모두들
관음봉에서 삼불봉에 이르는 1.8㎞의 자연성릉 구간을 말한다.
자연성릉(自然城稜)이란 자연히 성곽 능선을 이룬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계속되는 능선 길이 협소하고 아기자기하고 변화무쌍하여 성곽 위를 거니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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