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철
전 한국외국어대 총장
한국세르반테스연구소 이사장
어릴 때 돈키호테 만화에서 우스꽝스럽게 거대한 풍차와 싸우는 기사 돈키호테의 모습을 누구나 접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까지 고전 필독서로 권하고 있는 세계적인 스테디셀러가 바로 『돈키호테』다.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뵈브는 돈키호테를 “인류의 성서”라고 불렀고,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돈키호테보다 더 심오하고 힘 있는 작품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돈키호테는 과대망상을 가진 사람으로 지칭되면서 부정적 인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돈키호테의 진정성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엉뚱하게 해석되고 있어 안타깝다.
돈키호테는 한마디로 자유와 정의를 지키는 기사(騎士)다. 연약한 아녀자를 보호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악인들과 싸우고, 자신의 정신적 지주인 둘시네아를 위해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영웅이다. 거대한 풍차와 싸우는 돈키호테는 단순한 광인이 아니다. 그의 눈에 풍차는 약한 자를 괴롭히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악당이다. 첫눈에 보아 싸워 이길 수 없는 거인일지라도 정의로운 기사 돈키호테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약자를 위해 악한과 싸운다.

세르반테스는 귀국길에 알제리 해적에게 붙잡혀 5년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다. 조국으로 돌아온 이 전쟁 영웅은 가난과 불운으로 감옥을 서너 차례 다녀오는 등 고단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여러 작품을 출판해 이름을 얻긴 했지만 결코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세르반테스는 온갖 장사를 다했는데, 닭 장사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문학적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68세의 나이에 『돈키호테』를 마무리하기까지 갖은 시련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그의 소설 『돈키호테』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작가는 자신의 얘기를 쓴다고 하지 않았던가.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기사 돈키호테의 모습이야말로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세르반테스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하겠다.
돈키호테는 “자유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그의 종자 산초 판사에게 충고한다. 자유야말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가장 고귀한 보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늘이 내려주는 빵 한 조각을, 하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감사할 필요 없이 떳떳하게 먹는 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역설한다. 당시 뇌물과 부정한 돈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는 부패한 귀족과 영주들에게 뼈 있는 비판을 던지고 있다. ‘땀이 혈통을 만든다’는 돈키호테의 근대사상은 혈통이 혈통을 만들고 세습되던 왕정국가를 부정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능력대로 공정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토피아 국가를 꿈꾸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무역 규모 1조 달러,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된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돈키호테의 ‘땀이 혈통을 만든다’는 외침에 딱 들어맞는다. 조상으로부터 크게 물려받은 자산이 없이 오로지 우리 모두의 땀으로 이룩한 위대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아닌가?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돈키호테의 정신이다. 근면과 땀으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면서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든 우리 국민이야말로 진정한 돈키호테가 아닐까.
돈키호테는 이제 더 이상 과대망상의 얼빠진 인간이 아니다. 자유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자를 지켜 주는 정의로운 인간이다. 올해는 『돈키호테』 2편이 발간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이 시대에도 돈키호테처럼 소신을 갖고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지켜 줄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박철 전 한국외국어대 총장 한국세르반테스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