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추사 김정희 고택

OHO 2022. 11. 29. 21:56

<秋史 金正喜 故宅>

장소 : 충남 예산군 신암면
방문일자 : 2022. 11. 29.

秋史先生學藝術碑(추사선생학예술비)

고택 입구에 있고 일반적인 비석 보다는 좀 작다. 비석 안의 글은 畵法有長江萬里, 書埶如孤松一枝(화법유장강만리, 서세여고송일지 -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 埶는 형세 '세' 또는 재주 '예'로 읽음)

김정희선생 고택(좌측) - 김정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김정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 예산의 집은 53칸 규모였는데 충청도 53개 군현에서 한 칸씩 건립비용을 분담하여 지었다고 한다. 1976년에 그중 일부만 복원해 현재 고택의 모습을 갖추었다. 월성위궁은 서울의 저택으로 김정희가 관직 활동을 할 때 주로 지냈던 곳이다. 예산은 조상의 터전이 있는 곳이라 김정희는 성묘와 독서를 위해 자주 왕래하며 이곳에 머물렀다.

김정희선생 유적(우측) - 추사 김정희는 그림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예술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나고 일찍 글을 깨우쳐 천재성을 보였다고 한다. 24세인 순조 9년(1809년)에 청나라 사신으로 떠나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간 김정희는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나 재능을 인정받고 이후 일생을 교유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고증학에 관심을 가졌다. 귀국한 후에는 '사실을 밝혀서 진리를 추구한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을 완성해 나갔다. 김정희는 제자가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 중에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많다. 55세 때인 헌종 6년(1840년)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 그의 글씨는 인기가 높아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헌종은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하여 유배중에도 글씨를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 일대는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증조모 화순옹주의 열녀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등의 유적이 있어 그의 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고택 입구

天池石壁圖(천지석벽도 - 원나라 황공망의 그림인 천지석벽도)


* 이렇게 기둥에 써 붙인 詩句(시구)를 주련(柱聯)이라고 한다

遠聞佳士輒心許(원문가사첩심허 - 멀리서 선비의 소문을 들으면 금방 마음을 터 놓게 되고)

老見異書猶眼明(노견이서유안명 - 늙어서도 특이한 글씨를 보면 오히려 눈이 밝아진다)

句曲水通茶竈外(구곡수통다조외 - 구곡산(중국의 명산) 물은 차 끓이는 부억 밖으로 통하고)

敬亭山見石闌西(경정산견석란서 - 경정산(중국의 명산)은 돌난간 서쪽으로 보인다)

且呼明月成三友(차호명월성삼우 - 또 밝은 달을 불러 세 벗(청풍, 명월, 작자)을 이루고)

好共梅花住一山(호공매화주일산 - 즐겁게 매화와 함께 한 산에 머물다)

天下一等人忠孝(천하일등인충효 - 천하에 제일가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요)

世間兩件事耕讀(세간양건사경독 - 세상에서 두 가지 큰 일은 밭갈고 독서하는 일이다)

畵法有長江萬里(화법유장강만리 -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書埶如孤松一枝(서세여고송일지 -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 埶는 형세 세 또는 재주 예로 읽음)

好古有時搜斷碣(호고유시수단갈 - 옛것을 좋아해 때때로 깨어진 비석을 찾고)

硏經婁日罷吟詩(연경루일파음시 - 경전 연구로 며칠 동안 시를 읊지 못했네)

万樹琪花千圃葯(만수기화천포약 - 만 그루는 기이한 꽃이고 천 이랑은 작약밭이요)

一莊修竹半牀書(일장수죽반상서 - 온 집안은 대나무가 꽉 차 있고 책상 위에는 책이 반이다)

안채 - 안채는 'ㅁ'자 모양의 6칸 대청에 안방, 건너방, 부엌, 광 등을 갖추고 있다. 6칸 대청은 흔히 많은 규모의 마루이다.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에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 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남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 주택 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直聲留闕下(직성유궐하 -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물고)

秀句滿天東(수구만천동 - 빼어난 구절은 하늘 동쪽(우리나라)에 가득하구나)

書已過三千券(서이과삼천권 - 책은 이미삼천 권이 넘고)

畵可壽五百年(화가수오백년 - 그림은 오백 년쯤 묵었겠다)

淺碧新瓷烹玉茗(천벽신자팽옥명 - 옅푸른 새 옹기에 옥명차(白山茶 좋은 것의 이름)를 달이고)

硬黃佳帖寫銀鉤(경황가첩사은구 - 짙누른 경황지 좋은 서첩에 은구(초서를 아름답게 쓴 것을 일컫는 말)를 쓴다

좀 뒷쪽에 있는 이곳은 현재 보수공사 중이다

松風吹解帶(송풍취해대 - 솔바람에 풀어진 옷고름을 날리고)

山月照彈琴(산월조탄금 - 산 위에 뜬 달은 타는 거문고를 비춘다)

秋水纔深四五尺(추수재심사오척 - 가을 물은 깊어도 겨우 네댓 자)

綠陰相間兩三家(녹음상간양삼가 - 녹음 사이로 보이는 건 겨우 두세 집)

大烹荳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고)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 딸, 손자의 모임이다)

靜坐處茶半香初(정좌처다반향초 - 고요히 앉았노라면 차가 한창 익어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듯하고)

妙用時水流花開(묘용시수류화개 -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네)

五畝種竹五畝埶蔬(오무종죽오무예소 - 다섯 이랑 대를 심고 다섯 이랑은 채소 갈고)

半日靜坐半日讀書(반일정좌반인독서 - 반나절은 정좌하고 반나절은 책을 읽고)

약간 멀리서 본 고택

石年(석년) - 김정희가 직접 제작한 해시계 용도로 쓰인 돌기둥에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쓴 글이라고 한다

해시계 -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는 이 네모난 돌기둥은 해시계로 쓰였다. 건물 전체가 동서 방향으로 자리 잡은 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추사기념관 앞에 있는 김정희선생석상(石像)으로 높은 기둥처럼 생긴 바위 위에 홀로 서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이다. 기단석에는 遊天戲海(유천희해 - 하늘을 노닐고 바다를 희롱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작가 등은 아래 사진 참조

위 김정희선생석상에 대한 설명으로 작품명은 고독한 예술혼, 작가는 강관욱, 설치년도 2008년이다. 고고한 예술혼을 지니신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제주 유배시절을 상상하며 "옥돌괴" 위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고독을 조각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추사기념관

기념관 앞의 추사 김정희 선생상

추사 김정희 평(評)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 초산 유최진(樵山 柳最鎭 1791 ~ 1869)

"공은 매우 청신하고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의 관계에 미쳐서는 의론이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 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 - 황사 민규호(黃史 閔奎鎬 1836 ~ 1878)

명문가의 후예 김정희(출생과 가문)

추사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 용궁리의 월성위(月城尉) 집안의 향저(지금의 추사고택)에서 1786년(정조 10년) 6월 3일에 태어났다.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추사의 가문은 명문으로 발돋움하였다. 김한신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조카 김이주를 양자로 들였으니 이가 곧 추사의 조부이다. 김이주는 외조부 영조의 비호 아래 대사헌, 형조판서 등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김노영, 김노경 등 아들 넷을 낳아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추사는 김노경의 맏아들로 백부 김노영에게 양자로 보내져 월성위의 봉사손(奉祀孫)이 되었다.

어린시절에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추사는 7세 때 쓴 입춘대길(立春大吉)의 글씨가 번암 채제공에게 인정받았다고 전하며, 당대 북학의 거두 박제가에게 수학하였다. 1809년 24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된 추사는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함께 연행에 나섰다

스승 옹방강(翁方綱 1733 ~ 1818)은 청나라의 고증학자로 명필로도 유명하였다. 경학과 금석학, 서화에 조예가 깊었고 탁월한 감식안을 갖춰 많은 제사(題辭), 발문(跋文)으로 서화(書畵), 비첩(碑帖) 등을 고증하였다. 1809 ~ 1810년 북경에서 김정희를 만나 사제 관계를 맺고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1809년 겨울 추사가 연경에 도착하자 연경 학예계의 명사들은 다투어 추사와 만나기를 희망하였다. 이때 만나게 된 당대의 석학 옹방강과 완원은 추사에게 있어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

연경의 대학자 완원은 추사의 학식과 학구열에 감탄하여 사제지의를 맺고 갖가지 진귀한 탁본들과 저서를 기증하였다. 이에 감복한 추사는 완당(阮堂)이라는 별호를 지어 완원과의 사제지연을 세상에 알린다. 또한 학예계의 원로 옹방강 역시 필담을 통해 추사의 실력에 반하여 즉석에서 사제지의를 맺었다. 그 외에도 연경 학예계를 이끌 차세대 학자들인 이정원, 이임송, 홍점전, 주학년 등 많은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추사의 귀국이 다가오자 연경의 여러 학자들이 모여 전별연을 베풀면서 정의(情義)를 잊지 말 것을 약속했으니 추사가 연경 학예계에서 얼마나 크게 인정받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추사는 귀국한 후에도 옹방강, 완원 등과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 받으며 중국 학예계의 정보를 얻고 본격적인 고증학의 진수를 체득해 간다

완원(阮元 1764 ~ 1849)은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경학을 연구하였고 문자학, 금석학 등 청나라 고증학을 집대성하는 연구와 저작을 남겼다. 추사가 북경에서 만나 스승으로 모셨다.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은 완원의 제자라는 의미이다

竹爐之室(죽로지실)
추사가 친구 황상에게 써준 현판 글씨로 차를 달여 마시며 항상 차향이 그윽한 서재라는 의미의 당호(堂呼)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眞興北狩古境(진흥북수고경)

황초령 신라진흥왕 순수비 보호각의 현판으로 '진흥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옛 지경' 이라는 의미이다

황초령의 신라 진흥왕순수비인 듯한데 진품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비석의 상부가 가로로 깨어져 있고 비석에 새겨진 글씨도 희미하게 보이는 등 세월의 흔적으로 많이 훼손되어 있다. 추사가 고증학을 연구했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듯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실학 뿐 아니라 비석을 해독하여 역사를 공부하는 금석학의 일인자이기도 했다. 1816년 벗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무학대사 비'라고 전해지는 비석을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 비석이 단순한 비석이 아니라 신라시대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다

제주도 유배기와 만년기

1819년 대과에 급제한 이래 출세가도를 달리던 추사는 183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 당하고 부친 김노경도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관직에 올랐으나 1840년에 윤상도의 옥사가 다시 문제가 되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귀양살이 속에서 추사는 더욱 더 학문에 힘쓰고 서예와 그림에 몰두하였다.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나 호젓한 유배지에서 추사의 학문과 서예, 그림은 더욱 그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또한 귀양살이의 고통과 슬픔은 추사의 예술로 승화되어 청경고아(淸勁高雅 맑고 굳세며 고상하고 아담함)하고 삼엄졸박(森嚴拙樸 무섭도록 엄숙하며 서툴고 순박함)한 경지에 이르렀다.

1848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온 추사는 1851년에 다시 권돈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다. 추사는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의 묘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였다. 그림을 그리고 후학을 지도하면서 불교에 심취해 한가로운 생활을 보내던 추사는 1856년 71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추사의 초석

흔히 조선후기 경주 김씨라 하면 김홍욱(金弘郁 1602 ~ 1654)이 중앙정계에 진출해 명문가로 부상하고 김홍욱과 그의 후손이 된 일문을 말한다. 경주 김문이 명문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왕실과의 통혼이 크게 작용했다

먼저 영의정 김흥경(金興慶 1677 ~ 1750)의 아들 김한신(金漢藎 1720 ~ 1768)이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 ~ 1758)와 혼인해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김한구(金漢耉 1723 ~ 1762)의 딸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1745 ~ 1805)가 됐다.

이로써 18세기 중후반 경주 김문이 외척세력의 중심이자 노론 벽파의 핵심 가문이 된 것이다

위에서 부터 華嚴寺(화엄사) 월성위 김한신의 글씨
無量壽閣(무량수각) 추사 김정희 글씨
詩境樓(시경루) 추사 김정희 글씨로
모두 수덕사에 보관된 현판이라고 함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시절 김상우를 양자로 들인 후 보낸 편지에는

吾家傳來舊規, 是直道以行, 兢兢固守, 罔敢或墜

(오가전래구규, 시직도이행, 긍긍고수, 망감혹추)

우리 집안에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규범은

"올곧은 도리로 사는 것이니 조심조심 굳게 지켜서 조금이라도 실추시키지 말라"

세한도(歲寒圖)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얼핏 보면 소나무 몇 그루의 그림 뿐인 듯하지만 그림의 왼쪽에는 글이 많이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글의 핵심만 간추린 것이 아래의 글이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만이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고 하여

어려움을 당했을 때라야 참된 충신(또는 친구)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표현했다

김정희의 묘

김정희와 첫째부인 한산 이씨, 둘째부인 예안 이씨 세 분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비문은 1937년에 후손인 김승렬이 짓고 새겼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아버지 무덤이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다가 71세에 생을 마쳤다 죽기전까지 글씨 쓰기를 계속했는데, 봉은사 경판전을 위한 현판인 판전(板田)을 쓴 쓴 것이 죽기 사흘전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그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하였고, 제자들이 다투어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시문을 바쳤다

추사 김정희선생 묘역

추사 김정희선생 묘비 - 阮堂先生慶州金公謂正喜墓(완당선생경주김공위정희묘)

김정희선생 묘와 그 옆의 묘비


<세한도 참고자료>

1. 세한도 개략
추사 김정희가 그린 그림으로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크기는 23cm*69.2cm.

이 그림은 추사가 귀양 시절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귀한 서책을 구해와 유배지까지 찾아와서 갖다준 것에 감명해 그려준 그림이라고 전한다.

사실 그림을 보면, 원근법도 맞지 않으며, 잘 그렸다고 볼 수는 없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가 문인화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사의(寫意)를 가장 잘 나타내는 그림이기 때문에 유명한데,

사의란, 그림은 그림 자체보다,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세한도는 추사가 이 그림을 그리게된 과정과 그 감정을 잘 나타냈다는 점에서 유명한 것이다.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김정희 미술관인 추사관 건물은 이 세한도의 건물을 본따서 만들었다.
여담으로 세한도에 얽힌 일화가 있는데,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흘러흘러 일제시대에 이르러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매니아(...) 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양도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난 석달 뒤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2. 세한도 발문(歲寒圖跋文)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
此皆非世之上有(차개비세지상유)
購之千萬里之遠(구지천만리지원)
積有年而得之(적유년이득지)
非一時之事也(비일시지사야)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 주고, 올해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 120권을 보내 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얻은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且世之滔滔(차세지도도)
惟權利之是趨爲之(유권리지시추위지)
費心費力如此(비심비력여차)
而不以歸之權利(이불이귀지권리)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내귀지해외초췌고고지인)
如世之趨權利者(여세지추권리자)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 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太史公云(태사공운)
以權利合者(이권리합자)
權利盡以交疎(권리진이교소)
君亦世之滔滔中一人(군역세지도도중일인)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기유초연자발어도도권리지외)
不以權利視我耶?(불이권리시아야)
太史公之言非耶?(태사공지언비야)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잇속을 좇는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孔子曰(공자왈)
歲寒然後(세한연후) 知松栢之後凋(지송백지후조)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송백시관사시이부조자)
歲寒以前一松栢也(세한이전일송백야)
歲寒以後一松栢也(세한이후일송백야)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성인특칭지어세한지후)
今君之於我(금군지어아)
由前而無加焉(유전이무가언)
由後而無損焉(유후이무손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더디 시들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소나무 잣나무는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공자)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然由前之君(연유전지군)
無可稱(무가칭) 由後之君(유후지군)
亦可見稱於聖人也耶?(역가견칭어성인야야)
聖人之特稱(성인지특칭)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비도위후조지정조경절이이)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역유소감발어세한지시자야)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더디 시드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烏乎!(오호) 西京淳厚之世(서경순후지세) 以汲鄭之賢(이급정지현)
賓客與之盛衰(빈객여지성쇠) 如下邳榜門(여하비방문)
迫切之極矣(박절지극의) 悲夫(비부) 阮堂老人書(완당노인서)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迫切)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3. 세한도의 서문(序文)

 공자왈 '세한연후 지송지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공자 말씀에 날이 추워진 연후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알겠다". 추사는 이 글로 제자 이상적의 변함없는 의리에 대해 칭찬과 고마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고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아! 서한시대처럼 풍속이 순박한 시절에 살았던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권세에 따라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였다. 하비(下邳) 사람 적공(翟公)이 문에 방문을 써서 붙인 일은 절박함의 극치라 할 것이다. 슬프구나! 완당노인이 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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