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윤봉길 의사 기념관
OHO
2022. 11. 29. 21:46
<윤봉길 의사 기념관>
장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방문일자 : 2022. 11. 29.

윤봉길의사 기념관 주차장에서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의 홍살문 - 홍살문은 예로부터 충절과 정절을 상징하는 문으로 관아, 능원 등의 입구에 세워 출입자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하고 있다. 홍살문은 호국원 전역을 일반지역과 성역지역으로 출입하는 내정문의 역할을 함으로써 참배객은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계단앞 잔디공원의 4.29 상해의거 90주년을 기념하는 윤봉길 의사 상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충의문(忠義門) - 양쪽 아래에는 쌍사자 석상

충의사(忠義祠)

참배객을 위한 충의사 입구의 향로와 안쪽 벽에 있는 윤봉길 의사 영정

배용순여사 묘소 안내문 - 매헌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는 1922년 16세에 윤봉길의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1982년 국민헌장 목련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1985년 장남 윤종이 사망하고 며느리와 손자들과 함께 노년을 보내던 중 1988년 서울 동작구 자택에서 숙환으로 향년 82세에 작고하였습니다.

배용순여사 묘소 주변 풍경

성주 배씨 용순지묘 -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5절)

배용순여사 무덤

윤봉길의사 기념관 입구

윤봉길의사 기념관 입구

윤봉길의사와 독립운동 - 윤의사(1908. 6 ~ 1932. 12)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덕산공립보통학교 재학중 3.1독립운동을 겪으면서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익혔다. 동학사상과 새로운 문물들을 익히면서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되었고, 이후 야학, 부흥원, 월진회 등을 조직, 운영하며 농민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의사는 일제강점기하에서의 농민운동에 한계를 느껴 1930년 3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듬해 5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나 1932년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를 감행했다. 의사는 의거현장에서 붙잡혀 상하이 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시(金澤市) 미고우지(小牛地) 육군공병 작업장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출생과 어린시절 - 윤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아버지 윤황(尹墴)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윤진영의 강인한 정신과 근면성실함을 이어받은 의사는 큰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아 글을 익혔다. 또한 어머니의 도움으로 말 더듬는 버릇도 고쳤다. 반면에 의사는 동네 아이들과 다투어 한 번도 진 적이 없을 정도로 지는 것을 싫어해서 별명이 '살가지' 즉 삵쾡이로도 불렸다.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 등 한학을 공부하던 의사는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의사는 덕산장터 등 고향마을에서 있었던 3.1독립운동을 보고 겪으며 학교를 자퇴했다. 이후 오치서숙(烏峙書塾)의 성주록(成周錄)선생에게 사서삼경 등 한학을 배우는 한편으로 동학사상과 각종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민족문제와 농촌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1923년경에는 일본어를 독학하였으며, 이 시기에 서당훈장이 되어 7~8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300여편의 한시를 지어 <명추 鳴椎>, <옥타 玉唾>, <임추 壬椎>, <염락 廉洛> 등의 시집으로 엮기도 했다

윤봉길 의사 홍구공원 의거 13주기를 기념하는 추도사(追悼辭)

윤봉길의사의 시집 명추(鳴椎) 등 한시 전시물

윤봉길의사가 쓴 농민독본(農民讀本) 내용의 일부분

농민운동에 몸 바치다 - 윤의사는 서당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각종 서적 등을 통해 국내외 정세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그러던 중 '공동묘지 묘표사건'을경험하고 문맹퇴치를 위한 농민운동을 추진했다. 야학을 비롯 부흥원, 위친계, 월진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마을의 부흥운동 등 농민운동을 추진했다. 특히 야학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농민독본> 3권을 편저했다. 1929년부터 쓰기 시작한 <기사년일기>에서는 일제식민지하 조국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울분을 표현했다. 의사가 추구한 농민운동은 단순히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잘살게 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의 정체성, 독립사상의 교육까지 포함된 것었다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 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 (농민독본 3권 > 중에서

월진회를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 자료들

지도로 표시한 윤봉길의사의 발자취 - 지금의 삽교에서 출발하여 서울, 선천, 신의주, 단동,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일으킨후 일본군에게 붙잡혀, 상하이에서 오사카를 거쳐 가나자와로 호송되어 여기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유해는 가나자와에서 도쿄, 부산을 거쳐 서울로 보내져 현재 용산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윤봉길의사의 글씨
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김구와의 만남 - 윤의사는 1931년 5월 독립운동이라는 더 위대한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말총 가공공장에 취직해 근무하기도 하고 채소가게와 밀가루 판매상 등을 하며 목적달성을 위해 기다리던 의사는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를 만나 상하이에 온 목적을 밝혔다. 몇 번의 만남을 갖고 의사의 진심을 확인한 김구는 일제 침략자들을 처단할 홍커우공원의거(虹口公園義擧) 계획에 대해 언급했다. 의사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안온하여집니다. 준비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1932년 4월 26일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했고, 김구는 홍커우공원의거를 비밀리에 준비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윤봉길 군이 홍구 소채장에 매채업을 하다가 어느 날 조용히 찾아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당사지처를 구할 길이 없으므로 선생님이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으므로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 백골난망 입니다." ..... "내가 전쟁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 불급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본즉 왜놈이 전승자위를 장하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소위 천황의 경축전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터이니 군은 일생일대 목적을 이 날에 달함이 하여(何如) 오". 윤 군은 쾌락하며 하는 말 "저는 이제부터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안온하여집니다. 준비하십시오" 하고 자기 침소로 돌아갔다

윤봉길의사 자필로 선서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과 당시 사진들
宣誓文,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爲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中國을 侵略하는 敵의 將校를 屠戮하기로 盟誓 하나이다. 大韓民國 十四年 四月 二十六日 宣誓人 尹奉吉, 韓人愛國團 앞

천지를 뒤흔든 상하이 홍커우공원의거 - 윤의사는 김구와 1932년 4월 29일 거행할 홍코우공원의거에 대해 논의하고 폭탄사용 방법 등을 익혔다. 일제는 상하이 사변 승전축하기념식과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기념식인 '천장절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한다고 보도했다. 아침 일찍 현장에 도착한 의사는 기념식이 거의 끝날 무렵 어깨에 매었던 수통형 폭탄을 기념식 단상으로 던졌다. 단상에 서있던 상하이 파견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일제의 군부와 정계 주요인사 7명이 모두 쓰러졌다. 가와바다 사다쯔구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은 다음 날 사망했고, 시라카와는 5월 사망했다. 해군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부로는 우측 눈을 실명했고, 주중일본공사 시게미쯔 마모루는 우측 다리를 절단했다. 나머지 주요 인물들 모두 중상을 입는 등 홍커우공원의거는 일제의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쾌거였다.

전세계로 퍼져나간 의거의 향기 - 윤의사가 결행한 홍커우공원의거는 국내 뿐만 아니라 중국 등 여러나라에 보도되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고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의지 크게 고무시켰다. 김구와의 협의를 거쳐 뤄양의 중국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 운영하는 등 중국정부의 태도변화로 한중연합전선 결성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중국내에의 새로운 독립운동 여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중국의 각 언론은 김구가 착성한 <홍구공원작탄안의 진상>을 보도했다. 이 글은 홍커우공원의거의 결행 이유와 목적을 밝힌 것이었다. 또한 하와이 등 미주지역 한인교포들의 재정지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마련하게 되었다

거룩한 순국 - 의거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윤의사는 상하이 파견 일본헌병대사령부에 감금된 채 두 차례의 심문을 받고 1932년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1월 18일 오사카형무소로 이감된 의사는 12월 18일 가나자와시로 재이감되었고, 다음 날인 12월 19일 가나자와시 교외에 위치한 일본육군공병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25세의 결코 짧지 않은 생이었다

1962년 3월 1일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보선 대통령이 윤봉길의사에게 수여한 건국공로훈장증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다 -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육군묘지에 인접한 공동묘지에 13년간 매장되었던 윤의사의 시신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3월 발굴되었다. '임시정부유해발굴단'과 가나자와에 거주하는 한인청년 박동조, 서성민 등으로 구성된 발굴단이 3월 4일 발굴을 시작해 마침내 6일 의사의 유해를 확인했다. 의사의 유해는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5월 부산에 도착하여 공설운동장에서 추도식이 거했되었다. 7월 7일 서울운동장에서 최초로 국민장이 거행되었고, 세 분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일본의 항복과 시게미쓰 마모루의 칼 - 윤봉길의사의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마모루가 1945년 9월 2일 미국의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이후 2003년 4월 29일 시게미쓰 마모루의 손자 시게미쓰 쓰토무가 예산군 충의사를 찾아 할아버지의 유품인 의전용 칼을 기증하였다

시게미쓰 마모루의 손자 시게미쓰 쓰토무가 예산군 충의사에 기증한 할아버지의 유품인 의전용 칼

梅軒 尹奉吉 胸像(매헌 윤봉길 흉상)

기념관 입구 안쪽에 있는 윤봉길의 글
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매헌 윤봉길의사 어록탑

월진회 금언

人生觀(인생관)
沐溪一曲水(목계일곡수 - 목계 시냇물 한 구비), 修德源自流(수덕원자류 - 수덕사 수원에서 내려왔다네), 滌吾身汚穢(척오신오예 - 탁한 내 심신 맑게 씻어주니), 無盡格千秋(무진격천추 - 끊임없이 무궁토록 흐르리)

학습관(學習觀)
不朽名聲士氣明(불후명성사기명 - 썩지 않은 명성은 사기가 밝고), 士氣明明萬古晴(사기명명만고청 - 사기가 밝으면 만고에 맑다), 萬古晴心都在學(만고청심도재학 - 만고에 맑은 마음은 모두 배움에 있고), 都在學行不朽聲(도재학행불후성 - 배움이 있는 행동은 명성이 썩지 않는다)

뜻을 세우다 - 일본글은 가짜다 ! 힘으로 우리나라를 덮쳐 국모를 살해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국왕을 몰아내고 나라를 뺏어 우리의 목숨과 재물을 업신여겨 인륜을 저버렸다. 이런 자들의 글을 배워 무엇하나?

다같이 나가자 - 희망의 나라로 가자 !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 똑 같이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 나는 밭을 갈고 너는 쇠를 다룬다 우리 세상이 잘되도록 쉬지 않고 일하자 앞으로 앞으로 더욱 앞으로

바로 보고 배우자 - 미래를 현재의 토대 위에서 준비하자 ! 우리가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꽃으로 알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시절은 봄철이 아니요 만물을 죽이는 가을철이다 우리는 삼동을 살아나갈 양식도 많이 준비하여야 하고 의복도 많이 준비하여야 격렬한 추위를 당할지라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생명창고를 지키자 - 생명창고는 농민의 몫이다 ! 농민은 세상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은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이다.

자유를 쟁취하자 - 사람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 사람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 세상을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나에 대한 생각 민중에 대한 생각 그리고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아진다.

큰 사랑을 깨닫자 - 큰 사랑에 눈을 뜨자 ! 우리 청년시대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일층 강인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다 나의 우로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이 길을 떠나간다는 결심이다.

이상을 실현하자 - 사람은 왜 사느냐 ! 이상을 세우기 위하여 산다 이상이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이다. 보라 !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하였다(이는 의거를 뜻하며 준비된 의사로서의 변신이다)

야외 세면대에 새겨진 忠義祠(충의사)

雲氣法然 萬物回春(운기법연 만물회춘 - 구름의 기운이 저절로 그런 것처럼 만물도 저절로 다시 봄을 맞이한다)

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孝者百行之本也
農者天下之大本
(효자백행지본야 농자천하지대본 - 효는 백행의 으뜸이요 농사는 천하의 으뜸이다)

梅軒尹奉吉義士史積碑
(매헌 윤봉길 의사 사적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