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인터넷산악회

경주 남산(금오산 20190719)

OHO 2019. 7. 20. 13:32

경주 남산(금오산 20190719)


1. 등산코스

서남산주차장 - 삼릉탐방지원센터 - 삼릉 - 상선암 - 금오봉(468 M) - 용장사지 - 설잠교 - 용장계곡 - 용장주차장(산행거리 7.7 KM, 소요시간 4시간)


* 당초 계획은남산의 정상인 금오봉에서 이영재, 백운재, 고위봉, 열반재, 관음사를 거쳐 용장주차장으로 도착하는 총산행거리 9.4KM, 소요시간 5시간 코스(등산지도상 A코스)를 산행할 예정이었으나 전날부터 폭우 예보가 있었고 또 제주도에 태풍이 도착해 700 밀리의 많은 비를 뿌렸다는 뉴스도 있어 짧은 코스인 B코스를 택했다. 다행이 날씨는 흐렸으나 산행중 비는 없었다


* 산행중 계속해서 석조불상이나 바위에 암각한 불상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석조 불상의 대부분은 머리가 없어졌다. 그 이유는 대략 아래와 같이 추정된다 함

 -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한 부상 파괴 흔적

 - 몽고가 신라를 침략하여 불력을 없애기 위한 불살 파괴의 흔적으로 분황사 우물에서 발견된 다수의 불두들

 -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활약에 화가난 왜병들이 사찰과 불사을 파괴한 흔적

 - 일제시대 일본 천황을 떠받들기 위한 일본의 음흉한 계략 흔적


* 등산중 길이 험하거나 경사 깊다거나 한 곳은 거의 없으며 대체로 무난하고 어려움이 없는 산행이 된다.


2. 경주 남산(南山 또는 金鼇山이라고도 함)의 특징

높이 : 468m
위치 : 경북 경주시 인왕동

특징, 볼거리

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경주는 시 전체가 역사박물관이다. 그 중 신라인들이 천년을 두고 다듬었던 남산은 그 자체가 신라인들에게 절이요, 신앙으로 자리한다. 한 구비를 돌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마애불이 맞이하고 골골이 남아 있는 수많은 절터와 유적은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기에 남산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산 자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우거진 송림사이로 뻗어 있는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면 곳곳에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경주사람들은 흔히 ‘남산을 오르지 않고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들 한다. 경주 남산은 평소에는 가기 힘든 곳. 휴가철을 맞아 산행과 함께 우리의 문화유산을 볼 수 있는 1석2조의 피서지다.


금오산(468m)과 고위산(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개의 계곡길과 산줄기로 이루어진 남산에는 1백여 곳의 절터와 60여구의 석불과 40여기의 탑이 있다.

이와 함께 남산의 지정문화재로는 보물 13개, 사적 12곳, 지방유형문화재 9개와 중요 민속자료 1개로 곳곳에 유적이 산재해 있다. 경주 신라문화원이 제작한 경주 남산지도에는 순례길만 70여개를 잡아놓았을 정도니 비록 산은 낮지만 발길 닿는 곳마다 등산로다.

하루 일정으로 남산을 둘러보는 코스로는 삼릉골을 따라 상선암-사선암-금오산-용장사터-신선암-칠불암-통일전(9.5㎞)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더 짧은 코스로는 용장사터에서 바로 용장골을 따라 하산하는 길(5.1㎞)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길이 약 8km, 폭 약 4㎞의 산줄기안에 불상 80여체, 탑 60여기, 절터 110여 개소가 산재하여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등 신라시대 역사 유물·유적의 보고인 점 등을 고려하여 선정되었다.

`경주남산불적지'로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칠불암마애석불 등이 유명. 동쪽에는 남산산성 등이 있다




경주 남산의 위치


등산지도(들머리는 동일하고 금오봉 이후 파란선은 실제 등산코스, 붉은 선은 당초 계획)


산악회제공 등산지도


트랭글 상에 표시된 산행 궤적


트랭글에 나타난 운동 정보


경주 서남산주차장


서남산탐방지원센터 입구


탐방안내도


입구부터 오래 된 소나무가 많다


삼릉(무덤 3개가 나란히 있어서 삼릉인 듯하다0


삼릉 주변(산 전체에 소나무가 많다)


남산 일원

(남산은 금오산, 고위산 2개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도당산, 양산 등을 모두 포함하여 부르는 이름이고 신라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많아 산 자체가 박물관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삼릉에서 금오봉까지 안내도


지진대피도이긴 하지만 등산지도나 마찬가지다


삼릉곡 제1사지 탑재와 불상

(계곡에 흩어져 있는 것을 모아 둔것이라 한다)


삼릉곡 제1사지 탑재와 불상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설명문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머리가 없는 불상이 많은 이유는 대략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과  몽고족 침략시 또는 임진왜란시 등 적들이 우리 호국불교의 힘을 꺽기 위해 저지른 소행으로 추정된다 함)




삼릉계(三陵溪)석조여래좌상



삼릉곡 제6사지 마애선각여래좌상


삼릉곡 제6사지 마애선각여래좌상(바위에 암각화 형태로 있다)


하늘말라리



상선암



삼릉곡 제9사지 선각보살상

(누워있는 하반신만 남아있는 암각화로 완전한 모습 대략 9M 정도로 추정되고 원 위치는 알수 없으나 현재 상선암 옆에 있다)


삼릉곡 제9사지 선각보살상


삼릉곡 제9사지 선각마애불


삼릉곡 제9사지 선각마애불

(설명문이 있는 곳에서 꽤 멀리 보이는 윗쪽에 있다)


바둑바위의 엽서 우체통(사진엽서에 글을 써서 두면 우체부가 걷어서 배달한다고 한다)



금송정(金松亭)


삼릉계곡 마애서가여래좌상(거대한 바위에 높이 6미터의 크기로 새긴 불상)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는 바위

(등산로에서 꽤 먼 거리에 있다. 뒷쪽 바위 아래부분에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상사바위와 포석곡 제9사지 석조여래입상


상사바위





남산의 최고봉 금오봉(남산을 금오산이라고도 한다)


남산과 망산의 전설

서라벌은 새벌이라고도 하며 새벌은 동이 튼후 가장 먼저 햇빛이 비치는 복된 땅을 말하는데, 어느 날 울퉁불퉁한 근육은 가진 남신과 아륻다운 여신이 이곳을 둘러보고는 "우리가 살 땅이다" 라고 말하니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아낙들이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두 산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산 봐라" 하고 소리치니 두 산은 더 이상 발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 남신은 남산(南山)이 되고, 여신은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한다



금오산 정상석(해발 468 )


금오산 정상에 있는 이정표(용장마을 방향으로 간다)


비파골의 전설

(신라 32대 효소왕 6년 697년 동쪽 교외에 망덕사란 절을 세우고 왕이 직접 참석하여 공양을 하고 재를 올리니 왠 못생기고 누추한 스님이 와서 "저도 재에 참석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하니 왕은 언잖았지만 참석케 하고 재가 끝난 다음에 중을 보며 조롱하여 묻기를 "어디 사는 비구니 인가?" 하고 물으니 중은 이곳 비파암에 산다 답했다. 왕은 다시 중을 보고 조롱하는 말투로 "어디 다른 데 가서 왕과 함께 직접 재를 올렸다고 말하지 말라" 고 하니 중도 역시 " 예, 알겠습니다. 임금님께서도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 날아가 버리니, 깜짝 놀란 왕이 신하들에게 다시 찾게 했으나 더 이상 찾지 못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임도가 나오면 용장사지 방향으로 간다


버섯


잠시후 다시 삼거리가 나오면 또 다시 용장사지 방향으로 간다


용장골은 금오봉과 고위봉의 사이에 있는 계곡으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인 동시에 많은 불교 유적이 있고 또 조선 세조 때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 스님과 매월당 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라 한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이 땅이 용장사지(용장사 절터)라고 한다



설잠교


설잠교는 매월당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놓은 것이라 한다



용장계곡



<매월당 김시습과 용장골>

용장골(茸長溪)은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21세 때(1455) 수양대군(세조)의 단종 폐위 소식을 접하고는 통곡한 뒤 읽던 책을 모두 불태우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고 한다.

수년간 전국의 명산대찰을 떠돌다가 29세 되던 해에 찾은 곳이 바로 이곳 용장사이다.

7년간은 은적암(隱寂庵)에 머물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했다

은적암에서 잡다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그는 뒤에 충남 부여 무량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다가 59(1493) 별세했다


매월당 김시습의 한문시


<용장골에서>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茸長山洞窈 不見有人來

(용장산동요 불견유인래)

용장산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細雨移溪竹 斜風護野梅

(세우이계죽 사풍호야매)

가는 비에 신우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곱게 흔드네

 

小窓眠共鹿 枯椅坐同灰

(소창면공록 고의좌동회)

작은 창가엔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不覺茅簷畔 庭花落又開

(불각모첨반 정화락우개)

깰줄을 모르는구나 억새처마 밑에서

들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용장골 출렁다리


<능소화>


능소화의 한자는 능가할 능(凌), 밤하늘 소(宵), 꽃 화(花) 로서 하늘을 능가하는 꽃, 즉 하늘을 능멸하는 꽃이란 뜻이다

덩쿨이 10 여 미터 이상 감고 올라가서 하늘을 온통 덮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는 꽃이다.

그래서 하늘 같은 임금조차도 가벼이 본다는 뜻이 되었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 자랑, 자만이라고 하며 어사화라고도 한다

능소화의 전설을 보면 구중궁궐의 꽃이라고 하는데 전설은 궁에서부터 시작한다

옛날에 얼굴이 복숭아 빛 같은 얼굴을 가진 밤에 아주 예쁘게 보이는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임금님의 눈에 띄어 하루밤을 보내고 빈(嬪)의 자리에 올랐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이후에는 임금님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소화는 오매불망 임금님을 기다렸지만 임금님에겐 워낙 여자가 많아 시기와 질투, 음모로 인하여 결국 깊은 구중궁궐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혹시 발자국 소리라도 나면 담장을 서성거리며 임금님을 기다렸지만 임금님은 끝내 오지 않았고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마침내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죽기 전에 자기가 죽으면 임금님이 오가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게 담장 옆에 묻어 달라고 했다

소화가 묻힌 담장 옆에 어느 날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을 능소화라 불렀다

능소화는 임금님을 기다리던 소화처럼 담 밖을 보려고 담을 타고 올라갔고

또 조금이라도 소리를 잘 들을려고 꽃잎을 나팔처럼 벌리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용장주차장


용장주차장 주변 풍경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