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 이야기
<함흥차사 이야기>
조선 태조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박순(朴淳)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태조(太祖)가 만년에 그 아드님 태종(太宗)과 틀어져 함흥으로 가서 오지 아니 하고, 태종이 문안하는 사자를 보내면 태조가 죽여 없애 버리는지라,
또 문안사를 보내야겠는데 가고자 하는 자가 없어 걱정을 하였다
그런데 박순이, “갈 사람이 없으면 신이 가지요.”하고 자원하였다.
함흥을 가는데 사자의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달린 말을 타고 가서 행재소가 보이는 곳에서 새끼 말을 길가에 잡아 매어놓고 그 어미 말만 타고 가니 어미와 새끼가 서로 돌아다보며 부르고 소리 질렀다.
태조께 문안을 드리니 태조가 이상히 생각하여,
“그 말이 왜 그러느냐?” 하였다.
박순은 얼른,
“이곳을 들어오는데 새끼 말이 있어 방해가 되기로 새끼를 길가에 잡아매었더니 미물이지만 정이 지극하여 그런 모양입니다.”하고 아뢰었다.
태조가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덜 좋았다.
다른 사람과 다른지라 박순을 묵게 하고 보내지 않더니 하루는 박순이 태조를 모시고 바둑을 두었다.
마침 쥐란 놈이 새끼를 몰고 아래로 떨어지는데 끝까지 새끼를 놓지 않았다.
박순이 바둑판을 밀어 놓고 엎드려 울며,
“미물도 저렇거든 전하께서는 어찌 부자분 사이에 서로 떨어져 살 수 있겠습니까?”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결국 태조는 마음이 돌아서서 서울로 환어할 것을 허락하였다.
박순은 그 허락을 받고 성공하였으므로 태조께 하직하고 귀경 길에 올랐다.
박순이 떠난 다음에 태조를 모시고 있던 제신들이 ‘지금까지 다른 문안사는 다 죽이셨는데 박순만은 왜 아니 죽이느냐’고 물었다.
태조가 내심으로는 죽이고 싶지 않으나 중신들이 태조와 박순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는 것을 모르고 그러는지라,
태조는 박순이 용황강을 이미 건너갔을 만큼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칼을 사자에게 주며,
“쫓아가 보아서 강을 건넜거든 그냥 돌아오고 만일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으면 죽여라.” 하고 명했다
.
그런데 박순은 가다가 병이 생겨 천천히 갔으므로 강 언덕에 이르러 나룻배를 타고 막 건너려 할 즈음에 사자가 당도하였다.
사자는 그 자리에서 박순의 허리를 베었다. 박순은 죽으면서, “半在江上, 半在船” 즉‘절반은 강 위에 있고 절반은 배에 있도다.’ 라는 시조를 읊고 죽었다.
태조는 그가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는 깜짝 놀라 통곡을 하며,
“박순은 나의 좋은 친구였는데 죽었구나. 내가 저하고 언약을 한 것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회경하기를 결심하였다.
태종은 나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화공을 시켜 끊어진 반신을 그림으로 그려서 박순의 아내인 임씨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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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朴淳, ?~1402년)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장으로, 본관은 음성(陰城),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우왕에게 갔으며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출전 - 야담 수필집《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