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O
2015. 1. 25. 09:01
<七步詩(칠보시)/조식(曹植)>
煮豆持作羹(자두지작갱)
콩을 삶아 국을 만들고
漉菽以爲汁(록시이위즙)
콩자반은 걸러 즙을 만들려는데
萁在釜下燃(기재부하연)
콩대는 가마솥 아래서 타고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속에서 흐느끼는구나.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서로 들볶음이 어찌 이리도 급한가.
* 世說新語 拔萃本
<작가와 시에 얽힌 사연>
* 조식(曹植) 192년~ 232년
중국(中國)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시인(詩人)이다.
자는 자건(子建). 시호는 진사왕(陳思王)이고 중국의 가장 위대한 서정시인(敍情詩人) 중 한사람으로 불리며,
아버지는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주름잡던 유명한 장군 조조(曹操)이다.
조식은 아버지 조조가 중국의 1/3에 해당하는 북부지방을 지배하고 있을 때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조가문(曹操家門)은 시인가문(詩人家門)이라 불렸을 정도로 시문(詩文)에 조예가 깊은 명사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세명이 있었다.
그들을 3조(三曹)라하여 "조조(曹操)와 두 아들 조비(曹丕), 조식(曹植)"을 역사가들은 손꼽는다.
그 셋 중에서도 조식은 아버지 조조와 형 조비보다 재능이 더 뛰어났던 詩人이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인 조조로부터 늘 깊은 사랑을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실제로 조조는 조식이 일찍부터 보여준 문학적 재능에 깊은 감명을 받아 조비 대신 조식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마음을 정했을 정도로 애정을 보인적도 있었다.
이러다보니 조식은 커가면서 늘 형 조비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았는데,
서진시대(西晉時代)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조비가 동생 조식을 더욱 괘씸하게 여기게 된 것은 당시 소년이었던 조식이 나중에 형의 아내가 된 견(甄) 부인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는 조조(曹操)에게는 자식을 낳은 15명의 비(妃)와 총 24명의 아들 그리고 5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자식을 낳지 못한 비(妃)까지 합하면 대략 40~50명은 넘을 듯 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曹昻)은
약관(스무살)의 나이에 "효렴"(孝廉)에 천거 될만큼 품행이 반듯한 아들이었다
효렴이란 부모에게 효도하고 충성심이 강한 자를 20만 명 중에 한 명 꼴로 나라에서 선발하여 모범인으로 여겨 관직을 주고 관리했으며,
효렴에 천거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안과 고을까지도 큰 경사로 여겼던 것이 당시의 실상이었다.
당시 조조는 장수가 이끌던 진영을 공격하여 장수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으나,
조조가 장수의 형인 장제의 아내를 강제로 첩으로 만들어 버리자 장수는 크게 원한을 품었고,
이 사실을 듣게 된 조조가 장수를 죽이려 했으나, 그 계획이 누설되어 장수가 먼저 조조의 진영을 쳐들어와 조조의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조조는 위기에 몰려 장수의 부하들에게 긴박하게 쫒기는 몸이 된다.
죽느냐 사느냐 긴박한 상황에 몰리자 조조의 맏아들 조앙(曹昻)은 자신이 타고있던 말을 아버지 조조에게 건네 태워 보내고 자신은 장수의 군사들과 맞서 싸우다 현장에서 죽었다
조앙(曹昻) 밑으로 조비(曹丕)의 바로 위의 형이 조삭(曹?)이 있는데,
기록에는 자세한 내용이 없는것으로 보아 어린나이에 아들 중에 가장 먼저 죽은것 같다.
그 다음이 조비(曹丕)이고 바로 밑 동생이 조창(曹彰)이며, 그 다음 다섯째가 지금 소개하는 조식(曹植)이다
서기 220년 조비(曹丕)는 치열한 경쟁속에 동생 조식을 누루고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고, 아버지 조조(曹操)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위왕(魏王)에 오른다.
왕에 오르자, 동생 조식을 시기하고 은근히 괴롭히는 일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에 따른 조식(曹植)의 좌절과 불행은 그가 지은 詩의 대부분의 주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조식(曹植)은 형들인 조비(曹丕)와 조창(曹彰)과의 후계자 권력 다툼에서 밀려났지만,
그의 詩를 흠모하고 문학적인 정서와 깊이를 따르는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비롯해 전국의 많은 문사(文士)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자 경쟁의식을 강하게 느낀 형 조비는 은근한 위기감을 느낀다.
마침내 동생 조식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럴 듯한 명분과 구실을 찾는데...
마침 아버지 조조의 장례식에 문상조차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효죄를 물어서
죽이고자 마음 먹고 동생 조식을 불러들여 다그치며 말하기를......
"네가 시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온 궁 안 밖과 도성(都城)인 허창(許昌)에 까지 파다하다는데,
그렇게 시를 잘 짓는다면 내 앞에서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보이라"하며 윽박지른다.
그러고는 "나와 너는 같은 형제이니 형제(兄弟)의 정(情)을 넣어 시를 짓되 절대로 형제(兄弟)란 글은 한 글자도 넣어서는 아니된다
만약 합당한 시를 지으면 네 목숨은 살려줄 수 있지만, 짓지 못하면 너에 대한 소문은 모두가 헛소문이므로 돌아가신 아버님과 나를 비롯한 세상을 능멸한 죄이니 절대로 용서 할 수 없어 그 죄를 물어 네 목숨을 거두겠다"고 한다
조식(曹植)은 대신들이 가득 모여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대청에서 부들부들 떨며 스스로 걸음을 옮겨 일곱 발자국 걸으면서 한 발자국마다 한 구절씩 시를 읊는다
이때 지은 詩가 모든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그의 名詩로 지금까지도 애송되는 조식(曹植)의 "칠보시(七步詩)"이다
조식(曹植)이 시를 지어 읊으며 울먹이자...
좌중에 모였던 모든 대신들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속에 흐느꼈고,
어떻게든 구실을 잡아서 죽이려던 형 조비(曹丕)도 끝내 눈물을 주루룩 쏟으며
안타까운 형제의 정에 그만 흐느껴 울고 만다.
결국 동생 조식(曹植)을 죽이지 못하고 살려 보내며
"다시는 도성(都城)으로 돌아올 생각은 말라"며 허창(許昌)에서 먼 봉지로 떠나보낸다.
조식은 그 후로도 늘 형 조비의 경계속에 자주 봉지를 옮겨다녀야 했고
평생을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떠돌며 불우한 인생을 살다가 4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 시를 아래와 같이 전해 어느 것이 진짜인지 논쟁이 있지만 일곱 걸음의 의미를 생각하면 앞에 소개된 것이 진짜가 아닌가 추측된다고 한다
<삼국지 연의에 전하는 시>
<칠보시(七步詩)>
煮豆燃荳箕(자두연두기)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는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이 가마솥 안에서 눈물 흘리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는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어찌 이리도 급하게 다려대는가~